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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온도> 그가 화장을 안 하는 이유

심혜진 명예기자 | 2019-08-21 오전 10:23:01
한 글쓰기 수업에 보조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 수업에선 글쓰기 기술을 가르치거나, 첨삭지도를 하지 않는다. 수강생들이 매주 글을 쓰면 그중 몇 편을 함께 읽고 합평한다. 내 역할은 합평하지 않은 나머지 글들에 대한 리뷰를 써 인터넷 카페에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2주 전, 한 수강생의 글을 읽고 신선한 충격과 좋은 기운을 동시에 받았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는 짧은 커트 머리에 화장을 전혀 하지 않고 주로 무채색 옷을 입고 강의실에 오곤 했다. 그저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완벽한 연출이었다.
 
 
그가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꾸미는 걸 즐겼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단발머리에 깔끔한 화장은 기본,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앞이 뾰족한 구두를 신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초등학생 1학년 아이들이 `화장놀이`를 한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여자아이들이 팩트형 톤업 썬 쿠션을 두드리고 빨간 립밤을 바르는 광경을 보고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는 게 보기 싫었던 건 아니다. 아직 자아정체감을 갖기 전의 아이들이 화장하는 이유는 뭘까. 예뻐지기 위해서? 남자아이들에 비해 유독 `여자`아이들만 예뻐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예쁨`의 기준은 뭘까. 그는 혼란스러웠다. 문득,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잘 살아가는 듯한 성인 여성`의 모습은 하나같이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속엔 자기 자신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꾸밈 노동을 대물림하고 있었다는 부채감을 느끼고 `꾸미지 않은 여성도 잘 산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대로 외모를 가꿔야 하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머리 짧은 여자, 화장 안 한 여자, 투박한 옷을 입은 여자로 교단에 섰다. 갑작스런 변화에 어색해하는 아이들에겐 성별에 따라 외모가 달라야 할 이유가 없음을 설명했다. 변화는 아이들에게도 찾아왔다. "빨강은 여자, 파랑은 남자"라던 아이들이 "색깔 좋아하는 데 여자, 남자가 어딨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슴 벅찬 기분을 느꼈다.

 
 
이와 같은 행동을 `탈코(탈코르셋)`라 부른다. 탈코는 처음엔 보정 속옷을 뜻하는 코르셋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였다. 이젠 남의 시선 때문에 억지로 꾸미는 것을 그만하자고 주장하는 사회 운동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그의 용기에 자극을 받아 나도 `탈코`를 해보기로 했다. 나 역시 `여성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지난 주말, 소심하게 눈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과감하게 `상의 속옷`을 입지 않았다. 원래 의미의 탈코를 한 셈이다. 처음엔 누가 쳐다볼까 신경이 쓰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시원했고, 후련했다. 그 답답하고 더운 걸 왜 하고 다녔지, 하는 후회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강사의 귀에 속삭였다. "저 오늘 탈코했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안 했어. 웬만하면 안 해. 너무 불편하잖아." 알게 모르게 탈코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 같다. 화장이든 코르셋이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 당연한 자유가 `모두`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젊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겠다.